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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로그/독서노트

박물관의 전시물 혹은 전승되지 못한 이야기들의 흔적 (스벤 슈틸리히, 『존재의 박물관』)

by NomadWeaver 202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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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박물관 - 스벤 슈틸리히 저/김희상 역 | 청미 | 2022년 05월 10일 | 원제 : Was von uns uebrig bleibt (2018)

 


 

 

우리 인간은 달리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갔던 장소에,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이를 위한 기념비는 드물다. 감사하는 일도 별로 없다. 그러나 항상 무엇인가 남는다. 우리의 흔적이, 우리 곁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리 안에 보존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보존된다. 어떤 이에게 이는 그저 두뇌의 기능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커다란 위안이다.
- 책 내용 중

 

 

"(...) 커피를 끓일 거야. 당신에게도 한 잔 가져다줄까?" 커플은 그동안 함께 쌓아온 경험과 습관적 행위를 바탕으로 공감대를 키우고 넓혀왔기에 몇 마디 간단한 말로도 깊은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 그저 입가를 씰룩하는 것으로 "커피 마시고 싶다"는 의중이 전달되며, 한 번의 손짓으로 "이제 곧 자러 갈게, 내일 일찍 나가야 하거든" 하는 의사가 전해진다. (...)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친숙함이 이런 소통의 바탕이다. "연인에게 말은 소통 과정의 극히 작은 일부일 따름이다. 커플은 주로 다른 소통 채널을 활용한다." 『사랑의 사회학』에 나오는 구절이다.
- 책 내용 중

 

 

이별을 수용하는 것만이 중요하지는 않다. 정작 중요한 핵심은 서로 이해하며 함께 보냈던 과거에 알맞은 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인생은 층들이 켜켜이 쌓인 모습을 보여주게 마련이다. 우리가 서로 알기 이전의 층, 이를테면 너의 어린 시절, 나의 학창 시절, 너의 첫사랑, 나의 첫 남자 친구는 서로 알기 이전의 층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이후의 층도 있다. 빠르든 늦든 생겨날 너의 새 아내, 나의 새 남편은 우리 이후에 쌓이게 될 층이다. '우리 이전'과 '우리 이후'의 층 사이에서 '우리'는 중간층이 되리라. 우리는 가장 높은 층도 아니며, 아마도 언젠가는 가장 중요한 층도 아니게 된다.
- 책 내용 중

 

 

모든 체험은 기억에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오래 주목해 기억하는 것은 뇌의 물리적 구조를 바꾼다. 신경 세포가 새롭게 결합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물질이 된다"고 에릭 캔들은 말한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 같은 두뇌를 결코 다시 쓸 수 없다." 제네바 대학교 정신분석학 교수 프랑수아 앙세르메는 인간의 두뇌 역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 책 내용 중

 

 

1. 박물관에 대하여

박물관은 기억하고 전승하기 위한 공간이다. 전시된 유물을 통하여 우리는 왕의 생할과 영웅의 설화가 탄생하는 순간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그럴 듯하게 상상한다. 박물관이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은 그렇듯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가장 숱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은 바로 '미상'이다. '작자미상', '연대미상'. '미상'. 혹은 전시물에 대한 설명에서 사용자나 제작자는 보통명사로만 기록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18세기 모 지역의 양반집에서 흔히 사용하던..."

유물의 연대가 문자 이전에 이르면 그 사용자나 제작자를 특정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해진다. 문자 이전의 사람들이 사용한 "이름"을 이제와서 알거나 유추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미를 담은 문자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겨놓았을는지 모른다. 약 2만년 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할 때, 모를 일이다. 이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유한 자신'을 상징하는 주먹도끼나 돌 화살촉을 '다녀감'의 증거로 그곳에 남겨놓았던 것은 아닐지.

 

책에서 다시금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은, 전승되지 못한 이야기들의 흔적으로 세상은 가득하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흔적을 남긴다. 빈틈 없는 흔적으로 가득한 모래 위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모래 위에 빈틈 없는 흔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샤피로의 쇠구슬처럼.

 

브루스 샤피로(Bruce Shapiro) - Sisyp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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